예수의 오상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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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창에 찔린 이를 바라봄
즈카르야서의 인용은
바라보는 사람을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으로 말한다.
이것과 연결해서 우리는
요한에서 독특한 점을 또 발견하게 된다.
마르코에는 십자가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
수석 사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이
예수를 모독하는 장면이 있다(마르 15,29-32).
마태오에서는 거기에
원로들과 십자가에 못 박힌 다른 강도들이 포함된다(마태 27,39-44).
루카에서는 지도자들과 군사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 가운데 한 명이
예수를 모독한다(루카 23,35-39).
그렇지만 이러한 장면이 요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공관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모독하는 장면을,
모독하는 사람이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를 향해 당당하게 서서
예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예수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에 예수를 모독하는 장면이 없다는 것에서,
예수를 그렇게 똑바로 바라보며 서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요한에서 놀라운 것은
죄명패가 세 가지 언어,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요한 19,20).
요한은 히브리어로 종교적 세계,
라틴어로 정치적 세계,
그리고 그리스어로 문화적 환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Beutler, Das Johannesevangelium, 499-500.)
직접 십자가 앞에서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지만,
예수의 죽음이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즉 인간 삶의 전반에 있어서 알려질 것을 암시한다.
즉 예수의 죽음은 한계가 없이 전해진다.
십자가 밑에서 명패를 처음으로 읽는
많은 유다인만이 아니라(19,20)
요한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사람은
비록 예수의 죽음의 순간, 그 장소에 있지 않았어도,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19,35)
그 죽음을, 창에 찔린 예수를 보게 된다.
그렇게 예수의 왕권이 전 세계적으로 선포된다.
그 결과 예수는
모든 이를 자신에게 이끌어 들일 수 있게 된다(참조: 10,16; 11,49-52; 12,32).(Moloney, The Gospel of John, 502.)
다시 말해 요한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모독하는 장면이 없고,
한편 예수의 죄명패가 세 가지 언어로 작성되었다는 것으로
요한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사람이
창에 찔린 예수와 마주 서서 그를 보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가 없는 상황에서도
모든 세대의 제자 공동체는
현존하는 예수를 만날 수 있고
창에 찔린 예수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Moloney, The Gospel of John, 506.)
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참조: 요한 3,14-15).
불 뱀에 물린 사람들이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난 것처럼(참조: 민수 21,6-9),
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들어 올려진 사람의 아들을 바라본다는 것이
요한 3장에서는 사람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 표현은 그다음 구절에서 반복되는데,
거기에서는 외아들,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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