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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오상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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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겸요한
댓글 0건 조회 10회 작성일 25-12-1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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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창에 찔린 이를 바라봄

 즈카르야서의 인용은

 바라보는 사람을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으로 말한다.

 이것과 연결해서 우리는

 요한에서 독특한 점을 또 발견하게 된다.

 마르코에는 십자가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

 수석 사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이

 예수를 모독하는 장면이 있다(마르 15,29-32).

 마태오에서는 거기에

 원로들과 십자가에 못 박힌 다른 강도들이 포함된다(마태 27,39-44).

 루카에서는 지도자들과 군사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 가운데 한 명이

 예수를 모독한다(루카 23,35-39).

 그렇지만 이러한 장면이 요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공관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모독하는 장면을,

 모독하는 사람이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를 향해 당당하게 서서

 예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예수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에 예수를 모독하는 장면이 없다는 것에서,

 예수를 그렇게 똑바로 바라보며 서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요한에서 놀라운 것은

 죄명패가 세 가지 언어,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요한 19,20).

 요한은 히브리어로 종교적 세계,

 라틴어로 정치적 세계,

 그리고 그리스어로 문화적 환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Beutler, Das Johannesevangelium, 499-500.)

 직접 십자가 앞에서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지만,

 예수의 죽음이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즉 인간 삶의 전반에 있어서 알려질 것을 암시한다.

 즉 예수의 죽음은 한계가 없이 전해진다.

 십자가 밑에서 명패를 처음으로 읽는

 많은 유다인만이 아니라(19,20)

 요한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사람은

 비록 예수의 죽음의 순간, 그 장소에 있지 않았어도,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19,35)

 그 죽음을, 창에 찔린 예수를 보게 된다.

 그렇게 예수의 왕권이 전 세계적으로 선포된다.

 그 결과 예수는

 모든 이를 자신에게 이끌어 들일 수 있게 된다(참조: 10,16; 11,49-52; 12,32).(Moloney, The Gospel of John, 502.)


 다시 말해 요한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모독하는 장면이 없고,

 한편 예수의 죄명패가 세 가지 언어로 작성되었다는 것으로

 요한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사람이

 창에 찔린 예수와 마주 서서 그를 보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가 없는 상황에서도

 모든 세대의 제자 공동체는

 현존하는 예수를 만날 수 있고

 창에 찔린 예수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Moloney, The Gospel of John, 506.)


 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참조: 요한 3,14-15).

 불 뱀에 물린 사람들이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난 것처럼(참조: 민수 21,6-9),

 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들어 올려진 사람의 아들을 바라본다는 것이

 요한 3장에서는 사람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 표현은 그다음 구절에서 반복되는데,

 거기에서는 외아들,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