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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오상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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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겸요한
댓글 0건 조회 12회 작성일 25-12-1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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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의 다섯 번째 상처 또는 예수의 오상의 의미

 지금까지 예수가 다섯 번째 상처를 입게 된 상황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요한이 성경을 인용하면서 해석한 오상의 의미를 살펴본다.

 

4.1. 파스카 제물인 예수

 예수의 다섯 번째 상처를 보면서,

 뼈가 부러지지 않은 예수의 죽음을 보면서,

 요한은 파스카 제물을 생각한다.

 이 생각은 이미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나타났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가리키면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한다(1,29.36).

 예수를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대신 희생될 파스카 양으로 부르고 있다.


 이 생각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날과도 연결된다.

 요한은 예수가 죽은 날이 준비일이었다고 말한다(19,31).

 이튿날은 안식일인데,

 동시에 큰 축일, 즉 파스카였다.

 즉 예수가 죽은 날은 파스카 전날이며,

 파스카 준비일에 유다인들은

 12시부터 성전에서 파스카 양을 잡기 시작했다.(Beutler, Das Johannesevangelium, 494.)

 요한이 자신의 수난기에서 공관복음과 달리

 아침 아홉 시나 오후 세 시를 말하지 않고,

 오직 예수가 유죄 판결을 받은 시간으로

 낮 열두 시만 언급한 것도

 예수가 파스카 양으로 죽을 것임을

 염두에 둔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공관복음도 예수의 죽음과 파스카를 연결한다.

 예수가 죽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한 식사는

 파스카 음식이다.

 예수가 성찬례를 제정한 최후의 만찬은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이루어졌다(마르 14,12; 마태 26,17; 루카 22,7).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파스카 당일에 죽은 것이다.

 성찬례의 제정으로 예수는

 자기 죽음이 세상을 위한 죽음임을 확실히 한다

 (참조: 마르 14,24: 많은 사람을 위하여;

 마태 26,28: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루카 22,19-20: 너희를 위하여).

 그렇게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대속(대신 죽음) 개념이

 요한에서 예수를 파스카 양과 연결하면서

 더욱 확실하게 표현된다.

 성찬례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예수의 죽음의 순간들 속에서

 파스카 양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죽음이 가져오는 대속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요한에서 예수는 파스카 양으로 죽기 때문에,

 예수가 직접 파스카 음식을 먹을 수 없고,

 그래서 요한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파스카 식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요한은 식사의 시기를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이라고 말한다(요한 13,1).

 요한이 성찬례 기사를 직접 전하지 않아도,

 그 의미는 요한 6장에서 읽을 수 있다.

 5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서

 우리는 최후의 만찬에서 나오는 표현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주셨다”: 요한 6,11 마르 14,22).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성찬례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 요한 6,51).(Beutler, Das Johannesevangelium, 225.)

 그렇게 암시된 대속의 의미는

 예수가 직접 파스카 양으로 죽으면서

 확실히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을 파스카 양과 연결하는 또 다른 단서는

 우슬초이다(요한 19,29).(Moloney, The Gospel of John, 504.)

 요한은 마르코와 마태오처럼 신 포도주 이야기를 전한다.

 그럼에도 요한은

 예수의 목마름을 강조하는 역할로

 신 포도주를 언급하는 것 같다(참조: 요한 19,28).

 신 포도주는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 강한 갈증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도 예수는 신 포도주를 받아 마신다.

 그렇게 수난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이 요한에 없는 것과

 십자가 위에서 신 포도주를 받아 마시는 것이 연결된다.

 수난의 길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예수의 모습이

 요한에서 그렇게 강조된다.

 하지만 신 포도주를 적극적으로 받아 마시려는

 예수의 의지와 반대로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는다.

 두 복음에서는 갈대를 사용하는데,

 우슬초 가지는 확실히 그 목적에 맞지 않는다.(Beutler, Das Johannesevangelium, 505-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