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 -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요한 3,1-2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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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이야기가(3,17)
18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요한의 종말론이 나타난다.
최후의 심판이
이미 지금 믿음의 시간
혹은 믿음을 거부하는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이
요한의 특징이다.
하느님께서 아들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에서
심판이 이루어진다.
이 관점은 물론
심판이 마지막에 이루어진다는(참조: 요한 5,25-29) 다른 관점을 통해 보충된다.
심판은 마지막 날이 아닌
지금 순간에 이루어진다(3,19).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의 행동이 악했기 때문에
심판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악한 행동”은
윤리적으로 비난해야 할 행동이 아니라,
신적 로고스와 함께 주어진 빛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즉 로고스와 빛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오지 않는다(3,20).
그렇지 않으면 그의 악한 행동이 드러나게 된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
그의 일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빛을 피하는 것처럼,
빛의 자녀들은
그들의 좋은 행위가 좋은 것으로 명백하게 되도록 빛을 찾는다(3,21).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개방하는 사람이다.
빛의 자녀로서 그는 빛에 도달하고
그의 행위는 좋은 행위로 증명될 수 있다.
요한의 종말론은
믿는 이가 응답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지,
하느님의 주도적 행동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영원한 생명”은
요한복음의 결정적인 구원 개념으로 나타난다.
공관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하늘 나라”로 표현되며,
이 표현은 요한복음에서는 3장에서만 나타난다.
구원을 위해서 인간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
유다교가 인간의 행위를 통한 구원을 이야기한다면,
새로 태어남은
물과 영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면서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아들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독이 든 뱀에게서 보호하기 위해서
구리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들어 올려진다.
그가 들어 올려지는 것은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선물로 내주는 것과 연결된다.
이 선물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표현인데,
그 사랑은 제한이 없으며
그렇게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누구도 제외하지 않는다.
즉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외아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셨고,
세상으로 파견된 사람의 아들은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다.
그 외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거부하는 순간 심판을 받게 된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인간은 물과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즉 하느님께서 세상에 파견하시어
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 예수를 믿어야 한다.
아들의 파견이 하느님의 사랑 표현이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연결된다.
구원을 뜻하는 전통적인 표현인 “하느님의 나라”는
요한의 “영원한 생명”과 동일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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