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 -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요한 3,1-2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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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에서 “들어 올려지는 것”으로 옮겨간다.
그것으로 육화(“하늘에서 내려왔다”: 3,13) 이후에
구원론이 눈에 띈다.
“들어 올려지는 것”은
한쪽에서는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는 것을 말하는데,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다음에 예수는 영광스럽게 된다.
다른 쪽에서는 더 넓은 의미에서
아버지께 들어 올려지는 것과
그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독이 든 뱀에게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막에서 뱀을 들어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3,14).
비교 점은 백성의 구원을 위해
들어 올려진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광야의 이주와 주님의 종이라는(이사 52,13 LXX)
구약의 두 가지 전승이 만난다.
그러나 구원은 인간의 협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협력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3,15).
사막에서 뱀을 들어 올리는 것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리는 것을 준비한다.
그가 들어 올려지는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것이다.
16절은 14-15절과 똑같은 구성을 보여준다.
문장 구조상 16ㄷㄹ은 15절과 일치한다.
예수의 말은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한다.
15절은 ‘믿는다’는 의미에서 동사 πιστεύειν만 언급하지만,
16절은 πιστεύειν εἰς라고 표현한다.
동사 πιστεύειν에 전치사 εἰς가 붙으면
εἰς 다음에 나오는 존재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것을 가리킨다.
16절에서 εἰς 다음에 나오는 단어는 ‘그’인데
문맥상 외아들을 가리킨다.
즉 외아들을 한 인간으로 생각하며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것을 뜻한다.
15절과 달리 16절은 전치사 εἰς를 사용해서
믿음의 대상을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다.
16절에서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리는 것” 대신에
아들을 선물로 “내주는 것”이 등장한다.
이 선물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다.
이 생각은 놀랍다.
“세상”이 요한의 다른 곳에서는
하느님과 대립하고
그가 파견한 존재와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참조: 요한 1,10).
이 절에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제한이 없이 유효하며
그의 구원 의지는 누구도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이
추론된다.
어디에 아들의 “선물”이 있는가?
십자가 죽음에서 아들의 내어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표현 παρέδωκεν(넘겨주다)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16절은 동사 ἔδωκεν(주다)을 사용하여
아들의 “선물”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그가 파견된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아들의 파견은(3,17)
사람의 아들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과 연결되며(3,13),
이것은 인류 가족의 구원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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