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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요한 3,1-2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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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겸요한
댓글 0건 조회 48회 작성일 25-02-07 21:28

본문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였으며 유다인들의 지도자였다.
 그는 예수를 “스승님”이라고 부르면서 질문을 시작한다.
 “우리는 안다”는 표현으로 그는
 자신이 예수를 올바르게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라는 표현으로
 그가 예수를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파견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예수가 “하느님에게서 왔다”(ἀπὸ θεοῦ ἐλήλυθας-ἔρχομαι 완료)고 표현하는데,
 사실 예수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ἐκ τοῦ θεοῦ ἔ́ξῆλθον-ἐξέρχομαι 아오리스트: 8,42; ἀπὸ θεοῦ ἔ́ξῆλθεν: 13,3; παρὰ τοῦ θεοῦ ἔ́ξῆλ-  θον: 16,27; ἔ́ξῆλθον παρὰ τοῦ πατρὸς: 16,28).
 물리적으로 하느님 곁에 있다가 온 것이 아니라,
 성부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지닌 존재로
 하느님과 일치해 있다가 온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예수가 하느님이시다(참조: 1,18; 10,30).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3,3).
 표현 γεννηθῆναι ἄνωθεν은 두 가지 의미,
 “다시 태어남” 혹은 “위로부터 태어남”으로 해석될 수 있다.
 널리 퍼진 의견에 따르면 요한의 예수는
 의식적으로 한 단어가 두 가지 의미를 갖는 표현을 선택한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에서는 새로 태어남을 의미할 것이다.
 표현 “하느님의 나라”는 왕국을 나타내는 것처럼 들리는데,
 하느님을 왕으로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숙한 표현이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의 요구는
 니코데모를 대표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나라 개념을 확장하게 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본다”는 표현은
 요한복음에 자주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공관복음서들에서 볼 수 있다(마르 9,1; 루카 9,27).
 여기에는 또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바탕에 있다(참조: 마태 18,3; 마르 10,15).
 표현 “하느님의 나라”는 요한복음에서 요한 3장에만 나타난다(3절과 5절).
 요한 18,36 이하에서만 요한의 예수는
 “그의” 나라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요한복음에서 결정적인 구원의 개념은 “생명”이다.
 공관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면,
 요한복음에서는 생명을 얻는 것이 구원을 가리킨다.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
 즉 종말의 구원에서 한몫을 가지려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구절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할 때,
 이 관점은 유다교의 관점과 다르다.
 유다교는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좌우된다고 말한다.
 즉 유다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말하지만,
 요한복음은 여기에서 새로 태어남을 말한다.

 니코데모는 예수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3,4).
 믿음이 없이는
 예수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질문에 예수는
 물과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새로 태어남은
 이미 머리글에서 예수를 받아들이고 믿은 결과로 언급된다(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