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 - 생명의 빵(요한 6,22-59) (5)
페이지 정보

본문
55절에서 예수는
그의 살이 참된 양식이고 그의 피가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말하면서
자신의 진술을 반복한다(55절).
형용사 “참된”은 자주 요한에서
순수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요한 6,55에서 의미는 더 그러하다.
나의 살은 하나의 비유를 넘어
정말로 먹기 위한 양식이다.
56절에서 “내 살을 먹고”에 사용된 동사 τρώγω(chew)는
“먹다”(ἐσθίειν, φαγεῖν)보다 더 극적이며,
요한에서는 여기와 13,18의 시편 인용에서만 나온다.
표현이 구체적이므로
표현을 상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은 맞지 않는다.
예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 안에 머무르고 예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56절).
더 이상 예수는 영원한 생명과 연관해서
나를 “믿는 것”이 아닌(참조: 3,12.15.18.36)
“나를 먹는 것”을 말한다(57절).
여기에서 두 표현,
“나를 믿는 것”과 “나를 먹는 것”은
동의어로 볼 수 있다.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에서 비롯된다(57절).
“안에 머문다”라는 형식은
13~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별사에서,
무엇보다도 15~17장에서 계속해서 전개될 것이다.
이 주제는
15,4-8의 포도나무와 가지 이야기에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17장의 예수의 기도에서 심화한다.
고별사에서 제자들이 예수와 일치하는 것이
예수가 아버지와 일치하는 것에서 근거를 찾는 것처럼
57절에서도 그러하다.
파견한 존재가 살아 있다면(“살아 계신 아버지”)
파견된 존재는 그를 파견한 존재 때문에 살아있다(57절).
그렇게 그는 아들 안에서 아버지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생명을 줄 권한을 가진다.
57절에서 예수는
자신을 그가 준 선물, 그의 살과 동일화한다.
“나를 먹는 사람.”
선물을 준 사람이 선물 안에 현존한다.
이러한 동일화는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을 이해하는데 가치가 있다.
예수가 구원을 위해서 준 빵과 예수를 동일화하는 것은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인 58절에서 확장된다.
- 이전글영원한 생명 - 생명의 빵(요한 6,22-59) (6) 25.03.11
- 다음글영원한 생명 - 생명의 빵(요한 6,22-59) (4) 25.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