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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 생명의 빵(요한 6,22-5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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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겸요한
댓글 0건 조회 8회 작성일 25-03-11 09:18

본문

48-51절은 중복 표현으로 묶인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51절)
광야에서 조상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주어진 빵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예수가 약속하고 그 자신 스스로인 빵은
광야의 빵을 능가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며,
죽음에서 보호한다.
이 빵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끈다는 것을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단지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이 부분은 예기치 않은 표현으로 끝난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ㄷ절)
이러한 표현을 성급하게 성찬례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요한의 형식에서 표현되는,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관점이 강조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을 봉헌하고,
그를 믿고 그들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봉헌하도록 초대받은,
모든 이를 위한 모범이 된다.
그럼에도 이 구절은 성찬례의 특성을 보인다.
특이한 것은,
루카와(22,19) 바오로는(1코린 11,24)
“너희를 위하여”라고 표현하지만,
요한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라고 표현하며,
“몸”(σῶμα) 대신에 “살”(σάρξ)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살”로 표현하는 것은 공관복음이나 바오로에게서 볼 수 없고,
오히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나 유스티노에게서 나타난다.

생명의 빵 이야기의 마지막 단락에서(6,52-59)
예수가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중요하다.
52절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다.
물리적인 의미를 넘어갈 수 없는 유다인들은
예수의 약속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실제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41절과 43절에서 유다인들의 “불평”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자신들끼리 상의하는 것과 항의하는 것.
이러한 의미는 52절에서 “말다툼”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예수가 절대로 하지 않은 주장에
“유다인들”이 항의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는 생명의 빵으로서 자신을 내어줌을 이야기했으며,
사람이 이 살을 물리적인 의미에서도 먹어야 한다고
명백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이 빵을 그의 살과 동일시했다.

이 의미가 맞다면,
예수는 53절부터 나오는 자신의 대답에서
새롭게 그들의 오해에 동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자유롭게 표현된다:
“나는 사람들이 내 살을 먹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가 원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에 머물 수 있다.
사람은 실제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
살과 피는 생명을 주는 음식인
아들의 육화된 삶과 죽음을 강조한다.
인간의 물리적인 육체만이 살과 피를 준다.
토라가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길렀다면,
예수는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면서
온 세상을 기른다.
살은 부서지고 피는 흘러내릴 것이다.
예수가 안식일을 어겨서
유다인들이 그를 죽이기로 했을 때부터(5,16-18)
폭력이 예상되었는데,
그 폭력적인 죽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순간에 이루어질 살과 피의 분리를
예수는 떠오르게 한다.

53절의 말은
장엄한 형식을 통해 준비되고(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동시에 예수의 인성과 신적 품위를 표현하는 칭호,
“사람의 아들”과 연결된다.
이 칭호는 요한 3,13의 의미에서 이해된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은 하늘로 올라간다.
이 관점을 비판하며
요한이 말하는 사람의 아들을
오히려 다니엘서 7,13-27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도 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통치는
짐승들의 나라에 대한 승리 이후에
지극히 높으신 분의 통치와 동일시된다.
“사람의 아들”은 수난의 경험과 결합하고,
그래서 구원과 품위와 결합한 칭호일 것이다.
아마도 요한이 말하는 사람의 아들 관점은
하느님의 종에서 더 명확하다.
이것은 이사야 52,13에 따르면
“높이 올라 찬미를 받아야 하며,”
이것은 요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론의 두 중심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