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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 생명의 빵(요한 6,22-5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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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겸요한
댓글 0건 조회 12회 작성일 25-03-11 09:11

본문

39,40 그리고 44절의 문장 “ἀναστήσω αὐτὸ(ν) 〔ἐν〕 τῇ ἐσχάτῃ ἡμέρᾳ”에
전치사 ἐν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 전치사는 가치 있는 고사본들에는 없으며,
또한 우리가 오늘날 신약 성경의 원문으로 사용하는
Nestle-Aland판에는 괄호로 표시되어
전치사가 원래 있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않는다.
전치사를 넣고 읽으면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로 번역되지만,
전치사 없이 읽으면
“마지막 날을 위해서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요한의 현재적 종말론과
(앞에서 본 것처럼 요한복음에서 심판은
마지막 날이 아닌 지금 순간에 이루어진다(3,19).
선택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 쉽게 일치한다.
 “마지막 날을 위해서”라고 번역하면
마지막 날을 위해서 지금 다시 살리는 것을 의미해서
미래적 의미보다는 현재적 의미가 더 강하다.

이어지는 부분은
“유다인들”의 “불평”과 예수의 권한에 대한 불쾌감과(41-42절)
무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으로(43-51절) 구분된다.
불특정 “군중”을 갑자기 “유다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요한이 의도적으로 바꾼 것이다.
“유다인들”은 요한복음에서
처음부터 예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1,19).
예수를 믿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유다인들”이 된다.

“불평”은 탈출기에서 만나는 주제이다.
탈출 16,2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한다.”
그들은 먹을 빵이 없고
이집트에 있는 고기 냄비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한 6장 전체가 탈출 16장과 연관된다는 가설이 있다.
예수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저항하는 이유는
물론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저항한 이유와 다르다.
요한에서는 빵이 부족해서 예수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말해서 질책한다.
예수가 질책받은 이 말은
예수가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은
예수의 아버지를 요셉으로 알고 있기에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비난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부분에서(43-47절)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믿음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48-51절)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
그가 주는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그의 살이라는 언급과 함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불쾌감을 증가시킨다.

“유다인들”이 의심하는 것은
예수의 부당한 주장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부활의 날에 완성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이들을
아버지가 그에게 이끌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오는 사람에게 이사야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리라”(이사 54,13).
그것은 예레 31,33의 새로운 계약의 약속과 연관된
추방 시기의 약속이다.
“모두”라는 말은 격려의 의미도 포함한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누구도 제외하지 않는다.
그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에게서 배우면 된다.
예수는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통로이다.
아무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참조: 1,18).
아버지에게서 온 예수만 아버지를 알려줄 수 있다(46절).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빵인
예수가 드러내는 것을(예수의 계시를)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즉 예수가 생명의 빵이다(4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