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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 생명의 빵(요한 6,22-5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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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겸요한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03-11 09:04

본문

그러나 군중은 이번에도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군중은 예수가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온 빵을 약속한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그 빵을 늘 달라고 청한다(34절).
이 청원은 요한 4,15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청원을 떠오르게 한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여인은,
예수가 그녀에게 준 물이 다른 본성에서 나왔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요한 6장의 군중도
예수가 줄 빵을 일상의 선물로 생각하지,
예수 자신이 예수의 선물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을 반복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이러한 약속에 요한 6,35의 약속이 짝을 이룬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본문들은 지혜문학의 내용과 비슷하면서도
그 의미가 더 뛰어나다.
집회 24,21: 나를 먹는 이들은 더욱 배고프고,
나를 마시는 이들은 더욱 목마르리라.)
모세, 만나, 지혜 또는 토라가 배고픔을 충분히 해결하지 못한다.
예수만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의 가장 깊은 것까지
만족시켜줄 수 있다.
이런 차이가 더 큰 이유는,
예수가 생명의 빵을 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빵 자체라는 것에 있다.
더욱이 35절의 이 표현은
선택된 백성의 한계를 넘어서,
예수에게 와서 예수를 믿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약속한다.

이어지는 부분은 생명의 빵으로 접근하는 것을 이야기한다(36-40절).
이 구절들은
예수를, 사람의 아들을 “본다”는 것으로 묶인다(36절과 40절).
군중은 예수를 보지만, 믿지 않았다(36절).
그 이유가 군중에게 있기보다는
아버지가 그들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37절).
예수에게 아버지가 준 모든 사람을 예수는 받아들이고,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느님이 선택하지 않고,
아버지가 예수에게 보내지 않은 사람은
생명의 원천인 예수에게 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해결이 쉽지 않은
요한의 예정설과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요한 어디에도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것으로 결정되어있다는 식의 예정설은
나타나지 않는다.
본문은,
예수가 끌어당기지 않고 아버지가 가르치지 않은 사람은(참조: 6,45)
예수에게 오지 않는다는 언급으로 제한된다.
예수의 파견은 긍정적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채우기 위해서 왔고,
이 뜻은 예수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에 있다(38-40절).
예수의 파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이야기하지,
누군가 영원한 생명을 빼앗기는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여기에서는
영원한 생명이 보편적으로 약속된다고 이야기한다.
예수를 보고 믿는 “모든 사람”은(πᾶς)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0절).
영원한 생명을 얻을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또한 여기에서 ‘아들을 본다’고 할 때
보는 것은 물리적 시각과 영적 시각을 동시에 의도하기에
믿는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를 보고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죽은 이들의 부활에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