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 - 생명의 빵(요한 6,22-59) (1) > 나의 형제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칸연구소

나의 형제 프란치스코
새소식 나의 형제 프란치스코

나의 형제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칸연구소

영원한 생명 - 생명의 빵(요한 6,22-59) (1)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명겸요한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03-11 08:58

본문

군중은 제자들이 떠났음을 생각했다.
그들은 티베리아스에서 온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넌다.
오천 명의 장정이 어떻게 배 몇 척으로 호수를 건널 수 있었는지는
서술자에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군중이 예수를 찾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수를 만난 군중은 예수가 도착한 시간을 묻는다.
하지만 예수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바꾼다.
예수에게는 군중이 자신에게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물질적인 빵을 배부르게 먹었기 때문에
그를 찾아왔다.
여기에서 그들은 참된 양식,
사람의 아들이 줄 영원한 생명의 양식에 대한 희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군중이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중은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모세의 계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모세가 준 율법을 지키면
하느님께 직접 다다를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러나 하느님을 이 세상에 알려준 아들을 믿어야만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다(1,18).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
유대적 신심 행위가 아닌,
예수를 하느님의 파견자로 믿는 것이 필요하다.
군중은 “하느님의 일들”(τὰ ἔργα τοῦ θεοῦ)이라고
복수로 표현하지만,
예수는 “하느님의 일”(τὸ ἔργον τοῦ θεοῦ)이라고
단수로 표현한다.
하느님의 뜻은 지시된 다수의 일들에 있지 않고,
예수에게는 순명 안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것에 있다.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인 예수 안에서
기준점을 찾는 믿음이다.

예수가 믿음을 이야기하자
군중은 조상들이 먹은 만나를 생각하며
예수에게 믿음을 위한 표징을 요구한다.
예수는 그 요구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군중이 이야기하는 탈출기 전승을 수정하고
새롭게 해석한다.
‘모세’가 하늘에서 빵을 준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며,
‘언젠가 한 번 준 것’이 아니라(δέδωκεν, 완료시제),
‘지금 주시는 것’이다(δίδωσιν, 현재시제).
또한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하늘에서 빵을 주신 것이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다.
빵을 표현하는 형용사 “참된”(ἀληθινός)은
이 빵이 다른 모든 빵,
심지어 모세가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준 빵을
능가함을 가리킨다.
명사(ἄρτον) 뒤에 형용사(ἀληθινόν)를,
그것도 관사를 붙인 형용사(τὸν ἀληθινόν)를,
배치하는 것은 강조 용법이다(τὸν ἄρτον τὸν ἀληθινόν).
이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이와 동일시된다(33절).
또 다른 차이는,
요한의 예수는 하늘에서 “주어진”(δίδωσιν) 빵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καταβαίνων) 빵이다.
그것으로 요한이
예수가 (내려) 온 것을 표현하는 것과 연결된다
참조: 요한 3,13; 6,38.41 이하.50 이하.58).
그것은 또 아버지에게 “올라감”을 표현하는 것과
짝을 이룬다(참조: 요한 3,13; 6,62;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