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 -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요한 4,1-42) (3)
페이지 정보

본문
독자를 놀랍게 한다.
여기에서 중심어 “이리”는 15절과 연결된다.
여인은 더 이상 “이리” 오지 않아도 되기 위해서
예수에게 생수를 청했다.
예수는 이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로 여인에게 그녀의 남편과 함께
“이리” 오라고 요구한다.
예수는 대화 상대방이 사용한 표현을,
다른 의미와 연결하면서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한편 예수가 여인과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
16절에서 의도적으로 주제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는 여인과 개인적인 대화를 시작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주제를 바꾸면서 그것이 가능해졌다.
장면의 성경 배경을 볼 수도 있는데,
구약의 우물가 이야기들은
(창세 24장에서 아브라함의 종은 레베카를 만나고,
창세 29,1-13에서 야곱은 라헬을 만나고,
탈출 2,16-22에서 모세는 치포라와 그의 자매들을 만난다)
항상 사랑 이야기이다.
처음에 남자나 여자가 물을 청하는 것이 있고, 대화가 이어진다.
여자는 남자를 데리고 집으로 가고,
그들은 식사하며,
그는 그녀에게 구혼하며 그녀와 결혼한다.
우리 이야기에서 마지막이 왜 다른지 질문할 수 있다.
요한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민족과 종교를 대변한다.
이 관찰은 그녀가 남편이 없다는 대답으로 지지가 된다.
예수는 그것을 다시 끄집어내 분명하게 한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다.
예수의 대답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불충실하다는 주제와 함께 연결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배신하고 그녀의 “남편”이 새로운 혼인 관계로 명예를 회복시키는
호세 2장의 여인 역할로 보인다.
이 방식으로 여인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의 “신부”가 된다.
호세 2장의 새로운 풍부함의 약속이 성취된다.
여인의 다섯 남편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1) 다섯 남편은 2 열왕 17,30-32.41에 따라
외국 민족이 들어오면서 함께 가지고 온
사마리아인들의 신을 대변한다.
본문은 일곱 신을 이야기하지만,
유대 역사가 Flavius Josephus는(Ant. IX, 288) 다섯만 이야기한다.
사마리아인들은 이 신들을 숭배했고
이제 참된 하느님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숭배한다.
2) 다섯 남편은 모세 오경의 다섯 책을 대변한다.
여인은 모세 오경의 전승을 따르지만,
하느님과의 연결에 충실하지 않은 사마리아를 대변한다.
여인의 결혼 생활 주제는
다음의 대화 주제인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 장소 주제로 매끄럽게 넘어간다.
예수는 여인의 생의 비밀을 이야기하면서
여인이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그것으로 그녀는 예수를 예언자로 고백하면서
예수에게 자신을 개방한다(19절).
처음에는 예수를 “유다인”이라고 불렀지만(4,9),
그것은 “선생님”으로 바뀌었으며(4,11.15.19),
이제 “예언자”로 발전되었다(4,19).
여인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공손하게 질문한다.
그녀는 그가 “예언자”임을 알았다.
사마리아인들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존재를 예언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숨겨진 과거를 알아맞힌 예수를
여인은 예언자라고 부른다.
이제 대화의 초점은 사마리아 여인에서 예수에게로 넘어간다.
여인은 주도권을 갖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 장소를 물어본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 장소는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주된 논쟁점이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이방신을 모시는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여겨
예루살렘에 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짐 산에서 예배를 드렸다.
새로운 주제는 여인의 혼인 관계를 비유적으로 이해할 때 설명될 것이다.
여인의 혼인 관계는 사마리아인들의 종교를 대변한다.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는 것은 아마
그리짐 산이 야곱의 우물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로
더 간단하게 설명된다.
사마리아 전승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곳과
야곱이 꿈을 꾼 곳을 그리짐 산으로 본다.
예수가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야곱의 우물가이며,
그리짐 산은 그곳에서 멀리 있지 않다.
장소를 보아도 연관성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나타난다.
또한 여인이 사마리아인들을 대변하기에,
여인의 삶(혼인 관계)을 말하다가
사마리아인들의 삶(종교 생활)으로 주제가 바뀌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렇게 변화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예수의 대답에서(21-24절) 출발점과 도착점을 구분해야 한다.
예수는 성경에 기초한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예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온다.”(22절)
그러나 기도와 희생이 다양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장소가 다르다는 것에서 오는 차이가 극복될 때
예배가 도착점을 형성한다.
이것이 일어나는 시간은 종말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는 무슨 뜻인가?
영은 미래에, “새로운 계약”의 시간에
백성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 될 것이다(참조: 에제 36,26).
진리는 히브리어 어근 אמת에서 오며
하느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즉 하느님의 신뢰할 수 있는 자기 선포를 묘사한다.
여기에서 진리는 거짓의 반대말이라기보다는 관계성을 표현한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마지막 대화에서
여인은 예수의 비밀에 더 가까워진다.
메시아가 와서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가르칠 것이다.
예수는 올 뿐만 아니라 이미 와 있고,
그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그녀 앞에 서 있으며
그녀와 함께 이야기하는 예수이다.
예수는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올” 메시아이고,
동시에 “세상의 구원자”로서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 이전글영원한 생명 -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요한 4,1-42) (4) 25.03.10
- 다음글영원한 생명 -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요한 4,1-42) (2) 25.03.10